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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흘러가는 시간, 흘러오는 시간
by 전재훈2023-10-16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의 아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져 간다는 내용이지요. 영화로도 만들어져 꽤 인기를 얻었던 작품입니다. 시간이 거꾸로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한 번쯤 상상해 볼 만한 것은 되나 봅니다.


시간에 대해 사람들은 진리처럼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빅뱅에 의해서 지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인류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어 갑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지나간 시간이 쌓여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그들의 무한 번식으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요.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들이 지은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행동에 의해 나타난 결과물이지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대학도 가고 대학원도 가고 자기 분야에서 맡겨진 소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처럼 놀기만 한 사람들은 그 결과로 가난의 수렁에 빠지거나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거나 화를 주시는 것도 사람들이 과거에 살아온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행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했던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질병에 걸리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미래의 나는 현재 어떻게 사느냐가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복 받을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런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생관이나 습관, 행동, 철학 등을 연구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공통적인 모습이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들이 만들어 지지요. 인터넷에 ‘십계명’을 쳐보면 온갖 종류의 십계명들이 검색됩니다. 건강한 습관 십계명, 웃음 십계명, 부부 십계명 등등 다양한 버전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모두 이런 십계명을 지키며 살다 보면 보다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동일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쓰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신앙으로 아이들을 길렀고, 그 사람들은 정직했으며, 그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실 수 있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합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는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복이 내 삶에 임하거나 내 자녀에게로 흘러갈 거라고 믿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어머니가 기도 열심히 하는 권사님이라면 그가 성공한 이유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말이지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에 내가 한 어떤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 미래의 어떤 내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에 사업을 한번 실패했던 것은 그 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모세가 80세 때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이유에 대해 모세가 애굽에서 40년을 살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왕자로 40년을 살게 하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살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베드로가 훌륭한 삶을 살아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서 제자가 됐다고 하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으신 이유가 베드로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미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목사님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내가 목사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일을 하는 목사로 세우시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내 현재가 과거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가 현재의 삶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예비하신 연단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기에 따라선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과거가 자기 의나 자기 공로가 됩니다. 혹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과거는 자기를 정죄하는 근거가 되지요. 자기 의나 자기 정죄는 둘 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들입니다.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다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과거의 삶이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거나 자기 정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과거에 방황하며 헤맬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느냐’고,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라고 원망하던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때의 그 기도를 회개하고 도리어 그런 삶을 하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시는 것 같았지만 항상 내 곁에 계셨노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일을 견딜 힘을 주시고 계셨노라고 고백하지요. 


과거에 내가 행한 어떤 일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되거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과거의 어떤 일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을 품게 됩니다. 


보다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이 내 삶의 역사에 부분 개입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신 것인가 하는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물론 내 삶의 선택의 책임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만들어 내지요. 하나님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라면 내 선택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내일 제 딸이 학교에 가면 놀다가 손가락이 부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온전한 지혜는 손가락이 다치는 일로 생겨나는 다음 일들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다치는 바람에 덤벙거리는 습관이 고쳐지고 조심성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또는 그 손가락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아이의 삶에 좋은 스승이 될 만한 의사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막는 것만이 개입이 아니지요. 그냥 보내는 것도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딸아이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제 딸이 저에게 울면서 왜 자기가 학교에 가게 두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아픔이 너무 커서 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원망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 그 일로 매사에 조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의사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알게 되면 제게 했던 원망을 감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나 사랑해서 그냥 다치게 두었고 회복할 때까지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병원 다녀준 것을 알게 된다면 제 딸아이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저렇게 될 수 있다’라고 하고,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렇게 되려고 이렇게 사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는 사람과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살게 하신다’고 선포하는 사람의 차이를 만들지요. 작은 생각의 차이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둘 사이의 고백은 너무나 다르고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며 삶의 무게도 다르게 느낍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시거나 방심하신 탓이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온 인류가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그 죄를 해결하게 하시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게 하지요. 수가성 여인이 잘못된 삶을 살아서 남편 다섯을 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간에 물 뜨러 나와서 사마리아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만나게 하시려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그 메시아를 수가성에 알리는 선교사가 되게 하시려고 남편 다섯을 두게 하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개념입니다. 가수 김장훈이 다들 포기한 비행 청소년들을 상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김장훈을 두고 하나님이 이 땅의 비행 청소년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아픈 과거를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는 잘못된 과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과거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여러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흘러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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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